장애의 역사가 곧 나의 역사다
4학년 1반으로 전학했다. 학년당 한 학급만 있는 시골 학교였다. 누가 누군지, 누구의 동생인지, 어디 사는지, 부모님은 누군지 다 알았다. 빠르게 적응하여 부반장, 반장, 전교 부회장, 전교 회장을 했다. 엄마가 학교에 오면 교무실로 불려갔다. 통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고 엄마는 당연한 듯 굴었고 나는 귀찮은 표정을 숨겼다. 우리 집 사정은 모두가 다 알았다. 담임선생님, 친구들, 친구들 부모님은 보라네 부모님이 농인이라는 걸, 통역을 필요로 한다는 걸, 노점 장사를 한다는 걸, 형편이 넉넉지 않다는 걸 알았다. 전교 회장의 학부모가 되면 학부모 대표 같은 걸 해야 했지만 우리 집은 예외였다. 친구들 부모님은 보라네 대신 우리가 도맡자며 일을 나눴다. 학부모 모임이 열리면 또 불려갔다. 어색하게 앉아 수어를 음성언어로, 음성언어를 수어로 옮겼다. 솔지네 엄마가 말했다.
“엄마들끼리 놀 거니까 가서 친구들이랑 놀아.”
“왜요? 우리 엄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데.”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필요 없어. 우리가 다 할 수 있어!”
솔지네 엄마는 내 등을 떠밀었다. 그날 밤, 엄마는 알싸하게 취해 돌아왔다. 기분 좋아보였다.
“엄마, 말하는 사람들이랑 노래방 갔다왔어? 재밌었어?”
엄마가 청인들과 노래방에서 어떻게 놀았는지 수수께끼 같았지만 즐거워보였다. 생각해보면 그 엄마들은 어딘가 좀 이상했다. 솔지네 엄마는 김밥을 말아 납품하는 일을 했는데 ‘정상의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우리 엄마와 허물없이 지내는지 알 수 없었다. 영권이네 엄마는 정말이지 훌륭한 순대볶음을 파는 분식집을 운영했다.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었는데 어떤 요리든지 척척 해내고 오토바이로 직접 배달도 하면서 영권이와 발달장애가 있는 둘째 아들을 먹여 살렸다. 나보다 늦게 전학 온 광구는 잘난 척이 심했지만 웅변을 잘하는 엉뚱하고 재밌는 친구였다. 같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어머니는 치병 중이라 매번 누워 계셨다. 아라네 부모님은 이혼했는데 아버지는 정말이지 도시 사람 같았다. 키도 크고 스타일도 근사했다. 유리네 집은 그중 가장 멀쩡한 ‘정상’적인 집이었는데 유리는 말했다. 엄마의 기대치가 너무 커서 힘들다고, 보라 네가 부럽다고. 부모의 가방끈이 길어도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생각했다. 혜정이 엄마는 딸 친구가 놀러온 건 처음이라면서 반색하며 닭을 잡았다. 철훈이와 돈승이네 엄마는 그 누구보다 나를 예뻐하는 멋진 어른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우리 부모는 ‘장애인’이 아니었다. ‘보라네 부모님’이었다. 친구들은 와플과 풀빵을 파는 엄마와 아빠에게 인사하며 수어를 배웠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리예요, 저는 아라예요. 매일 같이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쏘다니며 놀았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른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부모님의 얼굴은 사라졌다. 눈썹과 얼굴 표정을 움직여 말하는 ‘보라네 부모님’이 아니라 가정 설문지 내의 ‘고졸’ ‘자영업’ ‘특이사항: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크립 캠프 : 장애는 없다
유럽인들, 북아메리카 식민화 때
‘정상적인 몸’ 기준 정하면서 억압
미국서 장애인 캠프 ‘제네드’ 개설
처음으로 자유·평등·사랑 깨달아
미국의 장애 역사를 서술한 책 <장애의 역사>(킴 닐슨 지음, 김승섭 옮김, 동아시아, 2020)는 북아메리카 토착민 사회에서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거의 모든 토착민이 수어를 어느 정도 사용했고, 서로 다른 구어를 가진 부족들은 수어를 통해 소통했다”고, 그곳에는 장애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돌봄을 중심으로 살아왔던 토착민은 다른 몸과 정신을 ‘장애’로 규정하지 않았다. 유럽인이 북아메리카를 식민화하면서 ‘정상적인 몸’에 대한 기준이 생겼다. 노동을 할 수 있는 몸이 살아가기에 적합하고 시민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는 몸이라고 여겨졌다.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몸들은 숨겨지거나 전시되거나 수용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미국으로 향하는 노예선에서 장애가 있거나 병이 든 몸들은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바닷속으로 버려졌다. 식인 상어의 밥이 되었다. 산업화는 장애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냈다. 공장 가동 속도를 맞출 수 없는 몸들은 일할 수 없었고, 속도에 맞춰 일할 수 있는 몸들은 산업재해로 아픈 몸이 되거나 장애의 몸이 되었다. 그사이에서 이상한 몸들은 ‘프릭 쇼’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다. 사람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르기 위해 기꺼이 돈을 내고 구경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는 흉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공공장소에 나오는 것을 금지하는 법, ‘어글리 로’가 만들어졌다.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우생학이 퍼졌고, 장애인은 강제 단종의 대상이 되었다. 시설에 분리 수용되었고, 학살의 첫 번째 대상이 되었으며, 강제 불임수술을 당했다.
장애인을 위한 캠프 ‘제네드’는 그 역사 이후에 등장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미셸 오바마가 총괄 제작하고, 2021년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영화 <크립 캠프(Crip Camp)>는 1951년부터 1977년까지 미국에서 열렸던 10대 장애인들의 여름 캠프 제네드를 그린다.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분리 수용되거나,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던 장애인들은 제네드에서 말 그대로 천국을 경험한다.
“여자 캠프 지도교사가 처음으로 키스하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제 생애 최고의 물리치료였죠!”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장애인은 성적인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제네드는 아니었다고, 그곳에서 키스하는 법을 배우고 데이트를 하고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고 뇌성마비 장애인 닐 제이컵슨이 설레는 표정으로 회고한다. 크립(Crip), ‘불구’의 몸들이 서로 도와 수영을 하고, 휠체어에 탄 채 야구를 하고, 기타를 치고, 토론을 한다. “너 어디 아파?”라고 이상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필요한 것을 채우고 돕는다. 누군가의 말이 느리다면 천천히 듣고, 못 알아듣겠다면 알아듣는 누군가가 통역하기를 기다린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 전체 구성원이 모인 회의에서 토론을 통해 결정한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모든 결정은 비장애인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 캠프에서의 모든 결정권은 불구의 몸들에게 있다. 이곳에서 불구는 더 이상 혐오의 말이 아닌, 자긍심의 말로 변환된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나 불구야. 그래서 뭐?”라고 저항하는 법을 배운다. 장애·환경·퀴어·노동·페미니즘 활동가이자 작가인 일라이 클레어는 “자기혐오를 자긍심으로 바꾸는 일은 근본적인 저항 행위”이며 “우리가 죽길 원하는 자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재활법 504조 만드는데 바탕이 된 캠프
비장애인 중심 사회서 소외됐지만
캠프서 ‘불구의 몸’ 의견 존중 익혀
운동가 되어 정부 건물 점거 시위
‘차별 금지’ 재활법 504조 이끌어내
캠프 제네드에서 성장한 이들은 장애 운동가가 되어 1972년 10월 뉴욕 매디슨가에서 차도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인다. 직업환경과 교육환경에서 장애인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비차별을 요청하는 재활법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여러 차례의 시위와 집회 끝에 1973년 9월 재활법 504조가 통과된다. 그러나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시행되지 않는다. 이에 분노한 장애 운동가들은 1977년 4월 워싱턴시와 전국 10개의 보건교육복지부 사무실에서 시위를 벌인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장애인 120명으로 구성된 시위대가 보건복지부 건물을 점거한다. 연좌시위를 이어가자 FBI는 전화선을 끊는다. 혼란에 빠진 이들에게 농인들이 말한다.
“걱정하지 마, 우리에게는 전화선이 필요 없어.”
농인은 창가에 서서 밖에 있는 이와 현재 어떤 상황이고 무엇이 필요한지 수어로 소통한다. 마치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위기가 닥치자 초능력을 발휘하는 주인공 같다. 활동 보조가 필요한 장애인들이 차가운 맨바닥에서 목숨을 걸고 잠을 자며 시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다른 시민권 단체들이 연대한다. 책 <장애의 역사>에 따르면 게이 단체 나비여단은 보건복지부의 전화선이 끊기자 무전기를 밀반입했다. 멕시코계 미국인인 치카노 운동가들과 약물 이용자들의 풀뿌리 단체 그리고 전과자들의 풀뿌리 조직인 딜란시 스트리트는 종종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미국의 급진적 흑인운동단체인 블랙팬서는 따뜻한 식사를 매일 한 번씩 제공했다. 연좌시위는 25일 내내 이어졌다. 이들은 꼭 10대 시절의 여름 캠프 제네드 같았다고, 제네드에서 배웠던 것처럼 수어통역사 없이는 절대로 회의를 시작하지 않았으며,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연대하며 우리만의 ‘장애인 세계’를 만들어나갔다고 회고한다. 지도부는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하고, 전국 언론의 관심을 받는다. 마침내 정부는 장애에 따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강제조항에 서명한다. 제네드에서 배운 자유와 평등의 경험은 당사자 스스로 재활법 504조를 만들고 시행해내는 바탕이 된다.
장애의 역사가 곧 나의 역사다
제네드에서 키스를 처음 배웠다고 고백한 닐 제이컵슨은 같은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파트너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 전동휠체어 뒤에 매달려 “자, 출발!”하고 외치는 아이와 신나게 달리는 장면 뒤로 그는 말한다.
“인생을 통틀어 내 장애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내 아들 데이비드가 처음이었어요. 나는 아빠예요, 데이비드의 아빠.”
전동 휠체어를 타고 조금 느리게 말하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데이비드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농인 부모에게서 청인으로 태어난 코다(Children of Deaf Adults의 줄임말)인 나에게 부모는 ‘장애인’이 아니었다. 부모는 나에게 수어를 가르쳤고, 나는 눈을 마주치며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장애’가 된 건 입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는 농인 부모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표정을 찌푸렸다. 제네드에서 내가 자란 작은 마을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나의 부모는 ‘불구’가 아닌, 와플을 굽고 풀빵을 굽는 사람이었다. 그곳에는 장애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젠가 아빠는 말했다. 다시 태어나도 수어를 사용하는 자랑스러운 농인으로 살겠다고. 아빠의 그 말처럼, 나 역시 이 불구의 역사 속에서 당신의 딸인 코다로 살겠다. 이것이 나의 역사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데이비드가, 더 많은 캠프 제네드가, 더 많은 코다가, 비장애인 중심으로 편찬된 역사가 아닌 장애의 역사가 필요하다.
출처: 경향신문 (n.news.naver.com/article/032/0003069101?lfrom=kakao)